2000년 첫 방한해 한중 협력 '전면적 단계'로 확대 합의
외환위기 때 위안화 절하 자제…한중 투자협력위 출범 토대
한국과 중국의 경제협력 틀을 넓히는 데 한 축을 담당했던 주룽지(朱鎔基) 전 중국 국무원 총리가 12일 베이징에서 별세했다. 향년 97세. 주 전 총리는 2000년 중국 총리로 처음 한국을 찾아 김대중 대통령과 회담하고 한중 협력동반자 관계를 '전면적 협력 단계'로 발전시키기로 합의한 인물이다. 양국 간 투자 문제를 다루는 정부 간 공식 협의체를 만드는 데도 역할을 했다.
12일 중국 당국과 주요 외신에 따르면 주 전 총리는 병환으로 치료받던 중 이날 오전 11시6분 베이징에서 숨졌다. 1928년 후난성 창사에서 태어나 칭화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상하이 시장과 당서기, 국무원 부총리, 중국인민은행장을 거쳐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총리를 지냈다.
한국과의 인연은 총리 취임 직후부터 두드러졌다. 주 전 총리는 1998년 4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를 계기로 김대중 전(前)대통령과 만났다. 당시 한국은 외환위기를 겪고 있었다. 주 전 총리는 한국의 금융위기 극복을 지원하겠다는 뜻과 함께 위안화 평가절하를 하지 않겠다는 중국 정부의 방침을 밝혔다. 위안화 가치 하락이 아시아 국가들의 연쇄적인 통화 절하 압력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가 컸던 시기였다.
같은 해 11월 김 전 대통령의 중국 국빈방문 때도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당시 한중 양국은 '21세기 한중 협력동반자 관계' 구축에 합의했다. 한국은 중국의 위안화 환율 안정 정책이 아시아 금융위기 완화에 기여했다고 평가했고, 중국은 한국의 경제개혁과 외환위기 극복 노력을 지지했다.
주 전 총리가 한중 관계에 보다 직접적인 흔적을 남긴 것은 2000년 10월 방한 때다. 김 전 대통령의 초청으로 17일부터 22일까지 한국을 공식 방문한 그는 18일 청와대에서 김 전 대통령과 회담했다. 두 사람은 1998년 구축한 협력동반자 관계를 전면적인 협력 단계로 발전시키고 경제와 투자 분야의 교류를 확대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때 만들어진 합의 가운데 하나가 '한중투자협력위원회'다. 양국은 주 전 총리 방한 당시 투자협력을 확대하기 위한 정부 간 공식 채널을 만들기로 했다. 이후 산업자원부 장관과 중국 대외무역경제합작부장이 공동위원장을 맡는 양국 투자 분야 최고위 협의체로 이어졌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애로사항과 제도 개선, 중국 서부대개발 사업에 대한 한국 기업의 참여 등이 주요 의제가 됐다.
양국은 당시 환경과 첨단기술, 석유화학, 철강 등으로 산업협력 범위를 넓히는 방안도 논의했다. 주 전 총리는 중국이 추진하던 서부대개발 사업에 한국 기업의 참여를 요청했고 양국 간 투자 촉진을 위한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한중 경제관계가 단순한 상품교역에서 투자와 산업협력으로 넓어지던 시기였다.
주 전 총리는 한반도 문제에서도 김대중 정부의 대북 화해 기조를 지지했다. 2000년 방한 당시에는 그해 6월 첫 남북정상회담 이후 진행된 남북관계 개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남북 화해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지지한다는 중국의 입장을 밝혔다. 같은 방한 기간 서울에서 열린 제3차 ASEM에도 참석했다.
한국과 일본, 중국의 정상급 협력이 출발하던 시기에도 주 전 총리가 있었다. 1999년 김 전 대통령과 주 전 총리, 오부치 게이조 전 일본 총리가 아세안+3 정상회의를 계기로 조찬 회동을 시작하면서 한중일 3국 정상 간 협력의 초기 틀이 만들어졌다. 이후 세 나라는 정례적인 정상회의 체제를 구축했다.
주 전 총리는 중국 내부에서는 국유기업과 금융·재정 개혁을 밀어붙인 경제 관료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90년대 후반 부실 국유기업 구조조정과 정부 조직 개편을 추진했고 장쩌민 당시 국가주석과 함께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이끌었다. 중국은 2001년 WTO에 가입하면서 세계 무역체제에 본격 편입됐다.
중국의 WTO 가입은 이후 한국 기업들이 중국 생산기지와 내수시장으로 진출하는 환경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주 전 총리가 한국과 직접 협의했던 투자·산업협력 확대 역시 중국의 시장 개방이 빨라지던 같은 시기에 진행됐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대응에서 시작된 김대중 정부와 주룽지 정부의 협력은 2000년대 한중 경제관계가 교역을 넘어 투자로 확대되는 과정과 맞물렸다.






